불안한 당신을 위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법

아트인사이트/리뷰 2021. 1. 1. 20:13

 불안한 마음을 안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숨을 골라본 적이 있다. 소리 내서 나 불안해, 하고 말한 적은 없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차게 뛰는 심장이나 긴장해 하얗게 굳어진 머리, 어디에 둘 줄 모르고 어쩔 줄 모르는 시선 전부가 심리적인 불안을 행동으로 표현한 거였다.

 

 한 번도 불안해 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아주 가끔이라도 불안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는 추천하는 책이다. 전문 용어를 남발하며 어렵게 설명하거나 불안이 잘못된 것이라 우리를 꾸중하지 않는다. 작가는 불안해도 괜찮다며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주고, 책은 쉽게 읽혀 페이지를 넘기기가 즐겁다. 집중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시선을 잡아끄는 강의를 보는 것처럼, 이 책은 그렇게 읽힌다.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법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불안을 끌어안고 살아도 괜찮습니다.’로, 일상생활에서 평범하게 접할 수 있는 불안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는 왜 불안하고, 언제 불안을 느끼고, 이런 불안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이런 불안은 어디서부터 오는지 등, 불안에 대한 내용을 간결하고 알기 쉽게 전달해 읽는 이로 하여금 내가 느꼈던 감정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인상 깊은 내용은 따로 표시해두며 읽는데, 그런 부분이 너무 많았다. 

 

 2부는 ‘남들보다 조금 더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로, 일종의 정신적 장애를 다룬다. 공황장애, 사회불안장애, 범불안장애, 강박 스펙트럼 장애, 트라우마 및 PTSD로 총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해 알아가는데, 이러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볍게 읽어볼 만하다. 이제 우리 주위에서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 익숙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런 접근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구나, 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읽어볼 수 있다.

 

 작가는 직접 자신이 예민하고 불안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도 될 수 있었고, 불안에 대해 책도 쓸 수 있었다고 말이다. 공부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보다는 못했다가 잘하게 된 사람이 잘 가르칠 확률이 높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왜 이 쉬운 걸 모르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경험할 수는 없겠지만, 직접 겪어본 사람이 더 잘 안다. 이 책이 왜 이렇게 읽기 쉽고 명료하게 적혔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이 책에는 중간중간 과학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나 같이 과학을 잘 모르고 싫어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설명해줘서 좋았다. 처음 과학 용어를 본 순간에는, 심리학 수업에서 뇌과학을 배우는 것만큼의 충격이었으나 곧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촌이 땅을 샀다는 소식을 들으면 질투심과 내가 더 못났다는 생각 등의 스트레스로 교감신경이 항진됩니다. 교감신경이 힘을 받으면 심장은 두근거리고 호흡은 빨라지는 등 신체가 전체적으로 더 활동을 많이 하게 되지만, 반대로 위와 장 등의 소화기관은 멈춰버립니다. (…) 원래 부드럽게 움직이던 위와 장이 멈추니 배가 아픕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자존감 때문이 아니라 자율신경 때문입니다.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자존감보다는 훨씬 과학적입니다.” (p.24)

 

 얼마나 명쾌하고 재밌는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를 심리학적으로, 과학적으로 풀어냈다. 단순히 내가 못된 사람이거나 자존감이 낮아서가 아니다. 사촌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나쁜 심보로 뿔이 난 것이 아니다. 전부 알고 있으나 한 번도 엮어서 생각해본 적 없는 스트레스, 교감신경, 소화 작용 등의 단어들로 인해 정말 물리적으로 배가 아픈 것이다.

 

 15년간 정신의학과 전문의로서 많은 사람을 봐온 작가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책을 쓴다. 어렵게 고민할 필요도 없고, 그저 작가가 설명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아, 그런 거였어, 하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니 나도 예외일 수는 없다. 책을 읽으며 당연히 내 상황을 대입하고, 내 문제를 끼워서 생각했다. 나는 영어가 싫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는 늘 내 발목을 잡았으며, 그건 대학생인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영어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다. 그런 나를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귀한 것이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 하지만 둘러보면 원인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발견하면, 잡아야 합니다. (…)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당장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쉽게도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요.” (p.31)

 

 당연한 말이지만, 영어를 공부하면 된다. 영어를 공부하면 잘하게 되거나 적어도 내게 필요한 만큼은 갖출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하기 싫다는 이유와 게으름으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런 나를 알기라도 하는 듯, 작가는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의지로 없앨 수 있는’ 불안은 없애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영어를 못 해. 스트레스받고 불안해. 난 영어 때문에 망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나는 영어를 못 하지만, 영어는 내가 공부하면 되는 거니까 다행이야. 내가 행동하면 바뀌는 거잖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똑같이 영어를 못하더라도, 내가 영어를 못 한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의 양은 현저히 다를 것이다.

 

 

 


 

 사실 내 삶과 조금 더 밀접한 것은 불안보다는 우울이 컸다. 나의 우울은 그 자체가 이유가 되어 나를 더 무겁게 가라앉혔다. ‘넌 뭐 이런 거 가지고 우울해, 아주 복에 겨웠구나, 너보다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넌 정말 나약하고, 네가 우울할 이유는 없으니까 징징대지 마.’ 남이 그렇다고 하면 위로해줬을 텐데, 내게는 더없이 매섭게 혼냈다. 그런데 이 말을 읽는 순간 거짓말처럼 내가 나를 구박하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위로가 됐다. 

 

 “다들 불안할 만하니까 불안합니다. 불안 자체만으로 충분히 힘든데 굳이 죄책감까지 느낄 필요 없습니다.” (p.36)

 

 그래, 그럴 만하니까 그랬다. 우울할 만하니까 우울했고, 불안할 만하니까 불안했다. 그 감정이 또 다른 원인이 되어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한창 예민할 때,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이런 것도 못 버티고 스트레스를 받다니, 넌 구제 불능이야.’

 

 “불안하다면 그 이유를 갖고 불안해하지 말라며 다그치기 보다는, ‘지금 불안하구나.’라는 이 한마디를 해주는 게 낫습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해줘야 합니다.” (p.36)

 

 

 

 


 

 나는 인간관계에 많이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는 편이다. 누군가와 싸우거나 다투면 꿈에서까지 나오고, 갈등이 일어나기 전에 피해버리기도 한다. 사소한 말을 한 후에 곱씹으며 후회하고, 사소한 말을 들은 후에 곱씹으며 상대방의 의도를 지레짐작하기도 한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끊임없이 계산해보며, 나는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끊임없이 계산한다. 그 이유는 남들이 날 떠나가는 게 싫어서,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워서였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혼자 겪습니다. 혼자가 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누구나 어느 정도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많은 일을 혼자서 잘해왔고, 외로워도 잘 살아왔습니다. (...) 결과적으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내 인연 아닐까요? 그냥 주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나한테 소중하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누가 떠날까 봐 두렵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떠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p.129)

 

 작가의 말은 언뜻 보면 냉정하게 들린다. 결국 우리는 혼자라니, 혼자가 싫으니까 어떻게든 남과 함께 살려고 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쌓는 거 아니야? 하지만 다시 읽어보면 다정하다. 결국 혼자니까, 혼자여도 괜찮은 거다. 어떻게든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애쓸 필요가 없다는 거다.

 

 

 


 

 물론 책을 읽고 깨달았다고 해서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한순간에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를 공부하고, 불안과 우울에 대해 통달하고, 인간관계에 달관해 모든 스트레스를 내려놓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나도 모르게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 이거 아니잖아, 하고 다시 한번 상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서 물음표를 띄워주는 책. 이런 거였구나, 하고 다시 내 마음을 되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책. 이 바쁜 세상에서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다고 감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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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몰랐던 편견과 마주하다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아트인사이트/리뷰 2020. 12. 29. 23:33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장애인’, ‘정신병자’가 상대방을 비하하기 위한 욕설로 쓰이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고 편을 가르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폐를 끼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세상에서 우리는 흡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새다. 현재 우리 사회를 괴롭히고 병들게 하는 리바이어던의 정체가 궁금할 지경이다. 

 

 누구나 저만의 이유로 바쁘고 힘든 지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 힘든 것도 괴로운데 남이 힘든 것까지 고려할 여유가 없다. 취업은 안 되고, 출산율은 낮아지고, 경기도 어려운데, 뉴스를 키면 갖가지 혐오 범죄까지 일어나는 실정이다. 다들 편을 갈라 싸우고 있지만 사실 어느 편도 온전한 승자는 없다. 

 

 이런 순간에도 기꺼이 남을 향해 손을 내밀려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남들과 함께, 남들과 같이.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공동체’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은 정신과의사 안병은이 쓴 에세이,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다. 

 

 

 

 

 작가는 ‘정신질환이 일종의 형벌처럼, 치료는 일종의 벌칙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재 사회를 안타까워하고 경계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는 정신병을 가진 환자를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망상이나 환청을 숨기지 않아도 되며 중증 정신질환자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 마음껏 마음을 아파할 수 있는 세상. 나는 그런 세상을 위한 혁명을 꿈꾼다. 이 책은 나의 혁명에 관한 책이다.” (p.42)

 

 혁명이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스스로 혁명, 이라 칭할 만큼, 작가가 바라는 세상은 파격적이다. 적어도 현재의 한국이 그렇게 바뀌기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면 병원을 가야한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신병원을 가보라는 말은 걱정이 아닌 모욕이 되고, 장애인들과의 통합교육은 아직도 불쾌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정확한 수치를 들이밀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강제로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게 한다. 정신질환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걸 뉴스에서 몇 번이나 봤는데, 하고 은연중에 잠재 되어있던 편견을 ‘2018년 기준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정신질환자에 의한 범죄는 0.46%일 뿐이며, 정신질환자에 의한 강력범죄도 2.39%에 불과하다.’하고 꼬집어준다. 나는 책을 읽으며 그제서야 그랬던가, 하고 나의 편협한 시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내 일도, 나와 가까운 사람의 일도 아니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 없는 중증 정신질환에 대해 작가는 스스럼없이 현실을 들이민다. 가벼운 것도 아니고 심각한 정신질환이 있다면 정신병원에 입원해 다 나을 때까지 치료를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은 얼마나 무지했던가.

 

 “이처럼 정신병원은 ‘치워버리고 싶은’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역할을 했다.” (p.90)

 “짧은 기간에 ‘문명화’된 한국 사회를 살아간 정신질환자들은 ‘문명’의 관점에서는 받아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정신병원으로 내몰렸다.” (p.94)

 

 고백건대, 나는 정신질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언젠가 마음이 힘들 때는 혼자 앓지 말고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봐야지,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하면 안 되는 말에는 이런 게 있구나,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정신이 이상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정신병원에 가서 입원하는 게 그 사람과 타인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정신질환자들을 ‘치워버리는’ 것에 동의하고, 그들을 정신병원으로 내쫓는 것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입원 치료만이 답이 아님을 수많은 경험과 자료에 근거해서 말한다. 입원을 한다고 끝이 아니다. 정신질환자를 전부 정신병원에 가둬 끝낼 수는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신병원의 입원 치료에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환자는 공동체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나는 믿는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힘이 있다. 남이 함부로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환자가 치료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건강한 자기 돌봄의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다.” (p.185)

 

 비유하자면, 의사가 환자에게 언제까지나 물고기를 잡아줄 수는 없다. 언젠가는 혼자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가르쳐줘야 한다. 환자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 물고기를 잡아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도움과 배려가 약간은 필요할지언정 말이다.

 

 인간에 대해 확신에 가득 찬 따뜻한 믿음이 책 전체에서 느껴진다. 순탄한 인생을 살아와서가 아니다. 어려서는 ADHD로 고생했고, 의사가 되고 나서는 중증 정신질환자가 함께 일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볐다. 그의 믿음은 다음과 같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앓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익숙해져야 한다.” (p.271)

 

 작가는 정신질환자들을 고용해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기업 ‘우리동네’를 만들고 나서 부당하고 억울할 법한 일도 많이 겪었다. 정신 질환자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한다는 비난에도, 막상 겪게 되는 내부에서의 어려움에도, 정신장애인이라는 사람들의 차별에도, 성공할 수 없는 도전이 분명함에도 작가가 끝까지 밀고 나간 이유가 있다.

 

 “망할지라도 이 길이 어떤 길인지 남들에게 최대한 보여줘야 했다. 어떤 게 힘들고 실패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했다. 나는 추락하겠지만 남들은 더 멀리 전진하기를 바란다.” (p.332)

 

 모든 성공에는 실패가 선행된다. 시행착오 없이 한 번에 모든 일이 잘될 수만은 없다. 작가는 기꺼이 실패를 받아들이고 감행하겠노라, 정찰병이 되겠노라 다짐한다.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는 정신 질환자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는지 직접 가서 보고 경험하며 배운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

 

 작가의 주장은 급진적이다. 도덕적으로 옳고 훌륭한 이야기지만, 막상 내 옆집에 중증 정신질환자가 살고, 내 직장동료가 중증 정신질환자라고 생각하면 달갑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머리로는 그것이 옳음을 알면서도, 내가 겪게 되는 피해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아마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작가는 스스럼없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의 편협함과 비겁함, 그리고 무지를 마주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 여기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중증 정신질환자들에 대해 처음으로 마주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통합교육을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선택했으니 그렇게 심한 정신질환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소리 지르며 내 뒤를 쫓아오는 덩치 큰 남자아이가 무서웠고, 수업 시간에 갑작스레 난동을 피우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통합교육이 정답인지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장애학생과 일반학생, 선생님과 학부모까지 서로가 힘든 일인 것 같다. 장애학생과 일반학생이 함께하는 통합교육을 위해서는 전반적인 인식개선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식개선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작가는 ‘선입견은 함께하지 않을 때 더욱 강화된다’라고 한다. 인식개선을 위해서는 함께 해야 한단 뜻이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함께인가, 교육인가.

 

 모든 개성과 다양성이 인정받는 세상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시행하기까지의 수많은 장애물이 두렵다. 작가는 끊임없이 공동체를 주장하지만, 사회는 이미 개인주의화 되어간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핵가족에서 1인 가구로, 사회는 끊임없이 분열되는데 나와 다른 타인을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전부 끌어안는 공동체가 과연 가능할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맞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은 모두 다를지라도, 우리는 우선 그에 대해 생각은 해봐야 한다. 지변을 넓혀주는 책으로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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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의 입을 없앴나,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트인사이트/리뷰 2020. 12. 21. 01:33

 

 연극의 제목은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로,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 무언극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제목을 듣고 어떤 실험적인 기법을 도입하려는 건지,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배우들은 수많은 대사를 내뱉는다. 80분 남짓한 시간, 배우들은 잠깐의 암전을 제외하고는 쉼 없이 말한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배우의 말이, 서로 주고받는 대사가, 심지어는 대화가 소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배우들은 말을 하지만 누구도 듣지 않는다. 대사는 공허하고, 텅 비어있다. 사람들의 말은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아무말도 듣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혼잣말이 아니라면 모든 말은 듣는 이에게 닿기 위한다는 ‘목적’을 가진다. 상대방이 지나간 뒤에 말을 하거나 오기 전에 말을 해 시간이 어긋난다면, 상대방이 없는 곳에서 말을 해 공간이 어긋난다면, 그래서 상대방이 말을 듣지 못한다면 말을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듣는 이를 눈앞에 두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말을 하고 말이 들리더라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그건 듣지 않는 것과 똑같다. 이 연극에서 모든 대사는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다. 지극히 일방향적이거나, 오해와 거짓뿐이다. 

 

 

 연극이 시작하면 비정규직 시위와 절규, 정부의 형식적인 답으로 가득 찬 뉴스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잠깐의 암전 후,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가 ‘쇼타임’이라 말한다. 여자는 흰색 곰돌이를 안고 곰돌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엄마 곰은 요리를 하고, 아빠 곰은 말없이 밥을 먹고, 아기 곰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엄마는 왜 왔냐고, 돌아가라고 한다. 그리고 하늘 위로 올라간다. 다소 기묘한 이야기임에도, 여자는 ‘아기 곰과 엄마 곰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연극은 관객에게 친절히 설명하거나 해설해주지는 않는다. 단지 퍼즐 조각들을 던져줄 뿐이다. 배우가, 대사가, 눈빛이, 흘러나오는 음악이, 배경이 되는 뉴스가, 작위적인 웃음소리는 우리에게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된다. 관객들은 무대 위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우선 넘쳐나는 정보의 편린을 받아들여야 한다. 

 

 주인공인 수정이 계약직이란 말은 극 중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도 수정을 계약직이라 부르지 않고, 수정이 스스로 계약직이라 설명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비정규직에 관한 뉴스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관객들은 그것을 스스로 수정과 연관 지어야 한다.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관객은 들려오는 모든 소리와 보이는 모든 장면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한다. (실제 계약직인 것은 리플렛의 시놉시스를 통해 알 수 있다.) 

 

 

 던져지는 조각들을 맞추는 것은 관객의 자유다. 어떤 이들은 생각해볼 것도 없이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넘어갈 수도, 누군가는 끝내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나처럼, 연극이 끝난 뒤 다시 한번 연극을 곱씹어보며 아, 하고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내며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전혀 관계없다고 여겨졌던 일말의 사건들. 계약직 이수정은 정상호 부장이 호통을 치자 비 오는 날 그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앞에서는 싹싹하게 굴며 아부하던 권 대리는 둘이 함께 있는 것을 사진 찍는다. 사실 권 대리는 정상호 부장에게 ‘정상’호 ‘인’간 쓰레기라는 뜻의 ‘정상인’ 별명까지 만들며 정상호 부장을 싫어하고, 부장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아내 미정이 회사로 찾아가자 권 대리는 바람이 아니냐며 바람을 넣는다. 미정은 수정에게 전화를 건다. 

 

 이렇게 한 번에 정리해서 보면 권 대리가 미정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수정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것이 일목요연하고 자명한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 단서들은 8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아무런 맥락 없이 나온다. 그러니 하나씩 흘러나오는 정보를 퍼즐로 취급해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것도,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것도 전부 관객의 자유다. 

 

 아무도 소통하지 않는 무대를 보고 있자면 단순히 희극으로도, 비극으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일종의 부조리극처럼, 현실과 환상, 과거와 꿈을 넘나드는 이 연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분석하고 싶게 만든다. 흰 곰 인형과 검은 곰 인형의 의미는 무엇일까, 엘비스는 언제부터 수정과 함께했을까, 수정과 인기는 정말 사랑하던 사이일까. 

 

 

 극작가, 혹은 배우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수정은 정말 시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건가요, 정신병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병명은 무엇인가요, 아니면 다 알면서 그냥 모른 척하고 사는 건가요. (물론 코로나로 인해 공연 전후 극장 로비에서 출연진과의 대면 만남, 사인 및 사인 요청, 선물 전달 등은 모두 제한된다)

 

 마지막에 부장이 수정의 머리와 목을 시체의 심장에 들이대며 윽박지르는 것만 아니었어도 남편 인기가 시체인지 그저 아파서 누워있는 것인지 헷갈렸을 것이다. 하지만 답이 없는 수정을 보고 아, 정말 시체구나,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전에 나왔던 인기가 손을 떨며 술을 마신 후 베개 밑에 숨겨놨던 번개탄을 꺼내고, 휠체어에 앉아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과거 회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순히 부장이 꾼 꿈이 아닌 것이다. 인기는 실제로 자살했으며, 수정의 집 한가운데 누워있는 것은 환자가 아닌 시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극이 아니고 막무가내로 던져지는 조각을 관객이 직접 끼워 맞춰야 하는 만큼, 하나의 단서가 이전의 장면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고, 연쇄적인 실마리가 되어 관객이 직접 추리할 수 있게 한다. 수정이 인기를 부장처럼 잡아 왔나 싶다가도, 부장의 약이 비싼 걸 알고 인기에게 먹이려고 하는 장면이나 인기의 자살 장면을 보는 순간 둘은 정말 사랑을 했던 거구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말하는 것 이상을 들어야 소통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이상을 이해해야 의미가 있는 연극이다. 그 의미를 아는 관객만이 이 연극과 ‘소통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연극은 12.16(수)~ 12.27(일) 대학로의 드림시어터 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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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

아트인사이트/리뷰 2020. 12. 16. 15:27

 죽음은 왠지 무겁다. 쉽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어제 같이 논 친구, 어제 먹은 음식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있어도, 어제 죽은 이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대부분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가 된다.

 

 그것은 죽음이 되돌릴 수 없고 비가역적인 영원한 단절이기 때문이다.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우리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 절대는 없다지만, 단언할 수 있고 변하지 않을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죽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거다.

 

 누구나 오늘 혹은 내일, 언젠가는 죽지만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다. 우리는 죽음 후를 알 수도 없이 죽는다. 몇몇 종교나, 사후세계를 경험해봤다고 하는 이들은 그들만의 답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끼리도 전부 말이 다르다. 뭔가 불공평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이전에 죽었거나 앞으로 죽을 것, 둘 중 하나인데 우리는 죽음이 뭔지 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죽음 그 이후는 물론, 죽음 그 자체도 제대로 거론되고 있지 않다. 더러운 것을 피하듯 우리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피하고 꼭 말해야 하거든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다. 죽음에 대한 말이 저승사자라도 불러오는 것처럼 ‘괜히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하고 넘어가지만, 언제까지나 죽음에 대해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니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큼,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한다. 평생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 죽음이 닥쳐온 순간에야 불안해하며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입에 올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은 죽음을 그린 화가들과 죽음을 그린 작품에 대한 이야기다. 철학, 신학 등을 공부한 박인조는 삶을 위해 죽음을 바라본다. ‘죽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 삶의 모양과 색깔이 달라’지기에 ‘미리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친숙해’져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삶에 대한 절박함, 진정성 그리고 이유가 정제되고 순수해지기’ 때문이다.

 

 책은 총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에 말 걸며 알아가는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1부로, 우리의 첫 여정은 죽음에 대해 손을 내밀고 다가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2부는 죽음으로 인해 선명해지는 삶인 ‘죽음을 기억하라.’다. 삶의 유한함을 느끼는 것, 즉 죽음이 우리의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죽음 앞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인 ‘죽음이 남기고 간 것들’인 3부를 통해 책이 마무리된다. 사람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가야 한다.

 

 파트마다 작가가 엄선한 여덟 화가의 그림이 있고, 작가의 글이 있다. 각 화가마다 대표 격인 그림 하나가 있고, 같은 화가가 그린 다른 그림이 몇 점 더 실려 있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시각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림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다.

 

 작품에 따라 이 그림이 무슨 뜻인지, 어떤 죽음을 의미하는지, 화가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화가의 삶과 죽음은 어떠했는지 등을 말한다. 화가는 작품을 통해 죽음을 말하고, 작가는 작품을 우리에게 친숙하게 전달해주며,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운다. 이 글을 통해 책에 나온 작품 두 개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바이올린을 켜는 죽음과 함께하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Death playing the Fiddle), 1872년, 캔버스에 유화, 75x61cm,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한 한 줄 평을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라고 적었다. 작품 속 사람의 표정이 그렇게 보였기 때문일까. 이 그림은 아놀드 뵈클린 본인을 그린 자화상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해골이 붓과 팔레트를 든 화가의 뒤에서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그림이다.

 

 작가는 대표적인 그림마다 죽음에 관한 격언을 적어 놨다. 여기서는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를 인용했다. 모모는 시간을 훔치는 도둑에 관한 책인데 아이들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가까우니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시간에 대해,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모』에서 ‘죽음이 뭐라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게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람들의 인생을 훔칠 수 없지.’라는 말을 발췌했는데, 그림과 꼭 맞는 설명이다. 그림 속 남자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붓과 팔레트를 놓지 않고 있다. 해골은 남자를 두렵게 할 수 없다.

 

 뵈클린은 낭만주의 시대 스위스 화가로 각종 질병으로 12명 중 여섯 명의 자녀와 부인을 잃었다. 출세작이 없어 가난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마지막 20년은 난해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작가의 인생을 안다고 화가의 그림이 뜻하는 바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겠지만, 적어도 대략적인 짐작이나 가늠은 해볼 수 있다. 뵈클린은 적어도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았고, 그의 그림에는 죽음에 대한 그의 고찰이 묻어난다.

 

 

 

                                                            *

 

프레더릭 레이턴(Frederic Leighton),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신 위에서 화해하는 캐풀렛과 몬터규>(The Reconciliation of the Montagues and the Capulets over the Dead Bodies of Romeo and Juliet), 1850년경, 캔버스에 유화, 177.8x231.1cm, 개인소장

 

 프레더릭 레이턴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장면을 그려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만 그림에 있는 것은 아니고, 시신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다. 시신을 끌어안은 여성도 있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사람도 있으며, 악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캐풀렛과 몬터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을 목도하고서야 화해한다.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라 작가는 말하고 있으며, ‘죽음이 남기고 간 것들’이라는 3부의 이름에 걸맞게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화해하는 주변 사람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단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두 가문의 끝없는 분쟁을 잠재운다. 작가의 말마따나 ‘너무나 늦은 화해’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죽음 이후의 남겨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나의 죽음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화가인 프레더릭 레이턴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여지가 있다. 1896년 화가로서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세습 남작 작위를 받았는데, 작위 공포 다음 날 협심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작위를 세습할 직계혈족이 없어 그의 작위는 하루 만에 소멸하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렇듯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

 

 이 책은 전공 서적이 아니다.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보다는 그림을 통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죽음에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을 도와준다. 그림은 그저 수단일 뿐이다. 그림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작가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화가와 작품에 대한 격조 높은 이해를 원하는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사조가 어떻고 유파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 그림을 접해보지 않았고, 예술에 대해 가볍게 알고 싶다면, 넓고 얕은 교양을 얻고 싶은 사람에게는 꼭 맞는 책이다. 그림에 대해 몇 줄 정도 짧은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림을 혼자 분석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작가의 설명과 맞아 떨어졌을 때의 짜릿함이 있다.

 

 화가들이 그린 작품을 접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테마를 잡고, ‘죽음’에 대해서만 모아놓고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다. 화가들이 담아낸 순간 속 영원을 엿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제 목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

가 격 15,800원

지은이 박인조

펴낸날 2020년 11월 20일

판 형 신국판변형(142×210㎜)

분 량 284쪽

분 야 국내도서> 예술 > 미술일반/교양

ISBN 979-11-90927-98-7 03600

브랜드 지식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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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마티스 특별전: 재즈와 연극>

아트인사이트/리뷰 2020. 11. 23. 00:29

생명력을 그려낸 화가, 앙리 마티스

 

 

 클릭 몇 번이면 손쉽게 세계적인 명화를  전부 감상할 수 있는 오늘날, 왜 우리는 돈과 시간을 들여 전시회를 가야 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아우라 때문이다. 아우라는 발터 벤야민이 만든 예술이론으로, 예술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독한 분위기를 뜻한다. 

 

 같은 작품이라도 화면을 통해 보는 것과 직접 가서 원작품을 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복제품에서는 느껴질 수 없는 원작만의 아우라,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서 직접 전시회와 박물관, 미술관을 가게 된다. 구글 이미지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예술 작품을 직접 마주하고 나서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만끽할 수도 있다.

 

 오늘날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하나도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인테리어 소품이든, 인터넷에서든 우리는 손쉽게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감성을 필두로 SNS에서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 자주 눈에 띄지만, 만약 이번 전시회를 통해 그의 인생을 알고 작품을 직접 본다면 당신이 갖게 될 감동은 해시태그 그 이상일 것이다. 

 

 모르는 작품을 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아는 작품을 보는 게 더 재밌고 관심이 가니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열리는 앙리 마티스 특별전에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3월 3일까지 열리며, 10시부터 20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단, 입장 마감은 19시다. 월-금 11시, 14시, 16시, 18시, 토-일 11시, 14시 16시를 맞춰 간다면 도슨트도 들을 수 있다. 

 

 

앙리 마티스, 그의 드로잉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정물도 풍경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다.”

 

Lithograph on the theme La Pompadour 퐁파두르 주제의 석판화 1951 work by Henri Matisse ©Succession H.Matisse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직접 가서 봤을 때 솔직히 놀랐다. 그의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색채도 없이 흑백으로 선을 몇 개 긋지도 않았는데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조형적으로 아름다웠다. 

 

 앙리 마티스는 회화에서 중요한 세 가지로 화가, 모델, 모델이 화가에게 일으키는 감정을 말했다. 그는 단순히 모델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닌, 모델 개인이 가지는 분위기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잡아내서 그렸다고 한다. 새로운 모델을 구하면 그 모델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고 그 인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포즈를 직관적으로 발견해 그림을 그렸다. 같은 모델을 그리더라도 다른 자아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가진 시야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재현의 목적이 아닌 인물의 내면으로 본인이 직접 들어가는 것. 이 공간,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에 이끌리며 그림을 그렸다.  

 

아라베스크, Arabesque, Lithograph on Chinese paper, 63.3 x 46.4 cm, 1924 work by Henri Matisse ©Succession H.Matisse

 

 오달리스크는 터키 궁정의 궁녀, 하렘의 여자를 뜻하는데 19세기 초 오리엔탈리즘의 주요 테마로 서양 회화에 등장해 근대 나체화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앵그르, 들라크루아, 르누아르, 마티스 등 많은 화가가 이를 다뤘다. 앙리 마티스는 또한 화려한 격자무늬인 아라베스크 배경과 함께 모델을 그렸는데 모델과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며 관객들이 둘 다 관람하길 원했다고 한다.

 

 

 피카소도 질투한 컷아웃 기법


 

“가위는 연필이나 차콜로 선을

그리는 것보다 더 감각적이다.

색채를 곧장 잘라나가는 것은

조각가가 석재를 가지고 하는 일을 연상시킨다.”

 

The heart 마음 1943 work by Henri Matisse ©Succession H.Matisse

 

 컷아웃은 물감으로 색종이를 만든 뒤 그 종이를 오려 붙여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앙리 마티스가 시도한 독특한 기법이다. 앙리 마티스는 고령과 암으로 인해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이 힘들어지자 침대나 안락의자에 누워 조수의 도움을 받아 종이를 오린 후 그것을 핀과 못으로 벽에 붙이고 배열했다.

 

 이러한 컷아웃은 앙리 마투스가 도입한 새로운 기법이며, 피카소는 그의 작품을 보고 경악하고 질투했다고 한다. 마티스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컷아웃을 통해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는 컷아웃을 ‘드로잉과 색채 사이의 영원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했다. 드로잉을 통해 먼저 선을 그려놓고 색으로 면을 채워 넣는 것에 대해 고뇌했는데, 종이에 물감을 통해 색채를 완성해놓고 형태를 가위로 오려내는 것을 해결책이라 생각한 것이다.

 

 

 모든 예술은 작가를 통해 표현되며, 작가가 가진 생각이나 살아온 인생은 작품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앙리 마티스는 아픈 와중에도 끝까지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젤 앞에 앉을 수 없다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자신의 감정을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순히 종이를 오렸다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서커스를 주제로 한 <재즈> 시리즈는 컷아웃 기법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계획 없이 순간의 감정을 가위로 잘라내 이상적 형태를 발견하는 그의 컷아웃은, 마치 재즈의 연주처럼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래서 서커스와 연극, 신화를 다뤘음에도 제목은 재즈인 것이다. 

 

이카루스, Icarus, Lithograph after a cut-out gouache, 43.4 x 34.1 cm, 1947 work by Henri Matisse ©Succession H.Matisse

 위 사진은 작품 이카루스로 잘 알려진 해석만 해도 크게 세 가지가 된다. 첫 번째는 신화의 이카루스를 표현한 것으로, 파란색 배경은 하늘이나 바다, 붉은 심장은 태양을 향한 열렬한 동경, 노란색은 흩어져버린 날개를 뜻한다. 두 번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공군 비행사를 묘사한 것이다. 세 번째는 공중그네묘기로, 불빛 속에서 곡예를 부리는 곡예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처럼 앙리 마티스의 그림은 한 가지 정답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전부 오답인 것이 아니라 관객이 보고 느끼는 것이면 뭐든 정답이 된다. 그의 그림은 자유롭다. 관객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자신의 감정을 실을 수 있다. 마리 앙투스의 시선을 마음껏 곡해하고 왜곡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어내도 괜찮은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 외에도 마리 앙투스가 참여한 발레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위한 의상과 무대 미술, 낭만주의 시집의 삽화, 로사리오 성당의 스태인 글라스와 실내 장식 일체를 볼 수 있다. 그의 예술은 이젤 앞에서 그치지 않고 무대 위로, 시집 속으로, 성당 안으로 뻗어 나간다. 

 

안드레아 세라노, 마티스 채플, 2015 photo by Andres Serrano © Andres Serrano

 그의 그림은 아름답다. 관객은 모델만의 갖는 특별한 분위기를 그의 시선을 통해 읽어낼 수 있게 된다. 그의 그림은 생명력을 가지며, 관객은 그림을 보며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코로나 시국에 지친 당신을 위로해줄 앙리 마티스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힘들고 피곤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해야 한다. 사람이든 취미든,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유일한 종교는

작품에 대한 사랑, 창조에 대한 사랑,

진심 어린 신실함에 대한 사랑이다.”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세계미술용어사전

-앙리 마티스 특별전 전시회의 윤석화 도슨트

-아트인사이트 제공, 전시 현장 사진

 


앙리 마티스 특별전

- 탄생 150주년 기념 -

 

 

일자 : 2020.10.31 ~ 2021.03.03

 

시간

10:00 ~ 20:00

(입장마감 19:00)

 

*

월요일 휴관 없이 운영

공휴일 정상 개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티켓가격

성인 : 15,000원

청소년 : 12,000원

어린이 : 10,000원

 

주최/주관

마이아트뮤지엄

 

관람연령

전체관람가

 

-

아트인사이트, 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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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청춘, 메라비의 이야기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아트인사이트/리뷰 2020. 11. 22. 23:45

 “이제, 네가 추고 싶은 춤을 춰.”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조지아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 영화는 내게 청춘과 사랑, 용기와 함께 조지아에 대한 새로운 문화를 알려줬다. 줄거리와 함께 스포일러가 많으니 영화를 보고 나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 영화는 조지아 국립무용단에서 춤을 추는 청춘, 메라비를 이야기한다. 그는 춤을 추고 사랑을 하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메라비가 나아가는 길을 인상 깊게 봤던 장면들과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빛나는 청춘


 

 흔히들 청춘은 빛나고 젊음은 아름답다고 한다. 누군가 내 청춘은 아름답지 않다고 반문한다면, 어른들은 나이가 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한다. 억울해도 할 말은 없다.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니 그 시간이 지나가기까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감독은 우리에게 청춘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왜 흔들리고 아플지언정 빛날 수밖에 없는지 명쾌하게 보여준다. 밝게 웃는 주인공, 신나는 음악,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배경, 신나는 춤이 전부 이를 나타낸다. 사랑에 빠져 이라클리를 바라보며 밝게 웃는 메라비는, 카메라 뒤의 관객마저 설레게 만든다. 

 

 

조명


 눈이 아플 정도로 조명이 빛나는 장면이 두 군데 있었다. 첫째는 메라비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간 클럽인데, 흰 조명이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릴 정도로 깜빡거린다. 둘째는 메라비가 본 오디션인데, 햇빛이 거울에 반사되어 한 번씩 반짝거린다. 

 

 그 순간 우리는 아늑한 영화관에서 스크린 속 극 중 인물을 지켜보는 것을 넘어, 그 장면으로 들어가 함께 하는 등장인물이 된다. 클럽에서 같이 춤을 추는 사람이나, 오디션을 지켜보는 메리같이 그 시간과 장소를 함께 겪게 된다. 눈이 부시지만 피하지 못하고 메라비가 춤을 추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예정된 결과


 

 엄격하고 보수적인 나라 조지아에서 ‘호모’가 맞게 되는 결말은 정해져 있다. 자자는 숲에서 동성애 행각을 하다 걸려 국립 무용단에서도 쫓겨나고, 집에서도 쫓겨나 수도원에 가게 된다. 수도원에서 신부에게 강간당해 집으로 도망쳐오지만 가족들은 받아주지 않고, 결국 서커스단 옆에서 몸을 팔며 산다.

 

 잠시 만난 트렌스젠더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돈이 없다는 말에 온종일 몸을 팔았는데도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며 웃는다. 이곳에서 동성애는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고,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야 매춘이 고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메라비는 이라클리를 선택한다. 더 정확히는 자신의 감정에 따른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라클리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이라클리는 안정된 생활, 여자와의 약혼으로 도망치지만 메라비는 그 순간까지 이라클리를 사랑했다. 

 

 

생략


 때로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생각으로 비어있는 서사를 채우게 된다. 상상할 틈조차 주지 않고 휘몰아치는 영화도 좋지만, 상상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한 번씩 떠올리게 되는 영화도 좋다. 이 영화에서 그런 순간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자자를 대신해서 들어온 이라클리는 첫 등장부터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귀걸이는 중간에 없어졌다는 언급이 한 번 있었고, 그 행방은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진다. 메라비는 자신의 틴케이스에서 이라클리의 귀걸이를 꺼내 끌어안는다. 그리고 형의 결혼식에서 만난 이라클리에세 네가 잃어버렸던 귀걸이라며, 이제 필요 없다고 건네준다. 

 

 관객들은 메라비가 언제, 어떤 마음으로 가져갔는지 상상할 수밖에 없다. 메라비는 탈의실에서 이라클리의 옷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은 적도 있기 때문에 상상은 더 자연스러워진다. 이라클리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영화가 끝난 순간부터 관객은 새롭게 영화를 시작하게 된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


 

 

 이라클리가 사라지고, 메라비는 무너진다. 설상가상 형은 약을 하다 식당에서 싸워 함께 쫓겨나고, 버스에서 인사해서 알게 된 사람과 클럽에 가서 밤을 새우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공립무용단에서 춤을 추니 당연히 엉망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그만, 이라 말하지만 메라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춤을 춘다. 파트너이자 친구인 메리도 멈추라고 하지만 메라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해서 춤을 추다 결국 발목을 접질린다. 발목에 찬물을 부으며 아프다고 울지만, 이라클리의 전화 한 통에 금세 울음을 멈춘다. 단순한 오기였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장면은, 뒷부분과 결부되며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앙상블 자리를 놓은 중요한 오디션 자리에서도, 메라비는 그 정도면 됐다고 수고했다는 심사위원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춤을 춘다. 다친 발목에서는 피가 나 아프고, 남성적 이여야 하는 조지아의 전통을 모욕하는 거라며 급기야 심사위원 한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지만 메라비는 끝까지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춘다. 메리는 위에서 지켜보다 박수를 쳐준다.

 

 우리는 끝까지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아니라고 하더라도, 멈추고 그만하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그 일은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전부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이 시키는 대로 밀고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끝내며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라비의 형은 얼굴에 상처를 잔뜩 달고 들어온다. 널 보고 호모라고 모욕하기에 싸웠다는 말에 메라비가 아무 대답을 못하자, 내가 괜한 짓을 한 거냐고 묻는다. 메라비는 아마도, 하고 대답한다. 형은 말없이 메라비를 끌어안아 준다. 

 

 메라비가 동성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형에게 중요하지 않다. 형은 메라비를 온전히 받아준다. 메라비는 다양한 선택을 하며 계속해서 살아갈 거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는 메라비는 누구보다 용감하고 아름답다. 그런 메라비를 응원한다. 

 

 다른 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 신선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용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빛나는 청춘과 함께 웃고 싶은 사람에게, 두 시간 동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당신에게 추천한다.

 

 

-참고자료

아트인사이트 제공, 보도스틸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 And Then We Danced -

  

 

감독 : 레반 아킨

 

출연

레반 겔바키아니

바치 발리시빌리

아나 자바히슈빌리

 

장르 : 드라마

 

개봉

2020년 11월 25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 1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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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 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0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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