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팬레터 (19.12.26)
19.12.26 8시, 두산 아트센터, 4열 왼블
김종구, 문성일, 소정화, 박정표, 임별, 장민수, 안창용
아무것도 모른 채 막연히 한 번 봐야지, 했던 뮤지컬.
덕분에 처음에 세훈과 윤의 대화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세훈과 히카루가 함께 등장한 첫 넘버에서도 뭐지, 하고 이해가 안되고 어리둥절했고.
특히나 난 사람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데 비슷비슷한 문인들이 세 명이나 (끈달린 안경을 낀 이태준을 제외하자면) 있어서, 누가 주인공일까 헷갈렸다.
(얼마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냐면, 아버지께 뺨을 맞은 사람과 급사 세훈이가 같은 사람이란걸 조금 나중에 눈치챘다.)
그래도 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갈 때의 짜릿함이 더 좋기 때문에, 앞으로도 일부러 스포나 줄거리, 넘버를 찾아볼 생각은 없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데 대사까지 잘 안들리면 짜증난다. 가장 첫 넘버인 유고집은 더더군다나 가사가 잘 안들렸다. 눈 부릅뜨고 잘 들어야한다.)
아, 하지만 한 가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알고 가면 좋았을 것 같아. 모르는 고유명사가 주요 키워드로 계속 반복되니까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뭔가, 누군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진짜.. 보면서 다음 표를 구하고 싶었었다.
1부때 암막이 나올 때 에이 설마 벌써 75분 지났어? 아니지? 아니지 제발... 하고 불안해졌고...
애초에 내가 환장하는 주제(글, 문인,편지)와 앵슷한 두 남자의 관계가 나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히카루도 너무... 매혹적이고 섹시하고 고혹적이고... (어휘력의 부재가 여실히 느껴진다. 내가 본 히카루를 표현 할 수 없다.) 짜릿한 그 분위기가 있다. 소정화 배우님.. 상태가 그렇게 좋으셨던건 아닌지 중간중간 목소리가 갈라지는 건 조금 있었지만..ㅠㅠ.. 그래도 좋았다.
경성.. 일제 강점기 시대를 나타내는 특유의 말투가 있었는데 그게 못견디게 낯간지러우면서도 좋았다.
그 말투를 현실에서! 귀로! 들을 줄이야! 책에서만 읽어봤던 말투를 실제로 들으니까 신기한 기분이었다.
무얼? 그러지 말아라. < 예를 들자면 이런 느낌.. 특히 김해진이 그랬다ㅠㅠ (작중 역할과 배우분 이름을 섞어쓰고 있는데, 적당히 알아들어주길 바란다.)
글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사람 자체를 온전하게 투영한다.
그래서 난 글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아무 말 없이! 그림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 사랑에 빠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그림에 기역자도 몰라서 그럴 수 있음.)
왜 글은 그토록 사람을 끌어당기고, 매혹하고, 드러내고, 그 자체를 사랑하게 만들어버리는 걸까.
김해진은 시종일관 그녀가 누구더라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를 만나면'에서는 박색이거나 나쁜 사람이면 어쩌냐는 세훈의 질문에 '편지의 주인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한다.
마지막 '해진의 편지'에서도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만약 세훈이 처음에, 현실에서 '세훈'이 '해진'을 만난 순간에 말을 했다면, 그럼에도 그 사랑은 이어졌을까.
시종일관 예정된 비극이 날카롭게 목을 조여오는 것을 즐길 수밖에 없는 뮤지컬이다. 그런 분위기가 힘들다면 맞지 않을 수도.
끝나고 나서 마스킹 테이프는 품절이라 전자파차단스티커를 사고, '해진의 편지' 넘버를 반복 재생해서 집에 왔고,
집에 와서는 과제를 하며 프레스콜과 유튜브에 뜬 공식 동영상을 반복재생하고 있다.
또 보고 싶다. 왜 뮤지컬은 비싼가. 나는 왜 뮤지컬을 좋아하게 됐는가.
이중인격까진 아니더라도, 히카루는 확실하게 실체가 있다. 둘이 반목하는 부분도 그렇지만, -내가 글을 쓴 이유는 이거야 / 이게 아냐! 하는 대목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서술어만 반대되는 듀엣곡을 언젠간 들어봤는데.. 뭐더라..- 세훈이 진심으로 투서를 쓴 것은 제가 아니라고 외칠 때... 그는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에 거짓말 탐지기를 했어도 안나왔을거다ㅠㅠ
다들 조금씩은 의심을 했다는 것이 제일 안타깝다.
설마, 아니겠지. 문인들도-칠인회-도 그랬고, 해진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아악 근데...
사실 히카루-세훈이 같이 동반자살이나 잇따른 자살을 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다.
'거짓말이 아니야' 넘버에서 반투명한 거울 사이로 대조되는 춤을 추는 것도 너무 좋았고...
히카루가 세훈이 보다 더 강했고, 셀 수밖에 없었다. 펜으로 오른손을 찔러 히카루를 죽이기 전까지...
히카루를 죽이지 않았다면 선생님이 죽을 것 같았다니 그런 절절한 애원이 어디있겠는가.
세훈이가 해진을 사랑했는지 궁금하다. 뮤지컬을 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세훈은 과연 해진을 사랑했는가? 그렇게 깊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왜 러브레터라고 하는지, 혈서를 쓰는지 당황하고 걱정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정절을 선생님께서는 믿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쓴 것은 히카루, 즉 세훈이 알지 못했던, 혹은 알기 두려워했던 그의 진심이 아니었을까...
히카루라는 하나의 캐릭터를 설정해놓고 그에 맞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히카루는 온전히 세훈의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처음에는 무슨 생각으로 만나자고 했던거지? 라고 했는데, 그때는 '세훈'이 '해진'을 만나기 전이니까,
그냥 쨘 하고 나타나서 저는 남자이지만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주고 받았습니다, 라고 했다면 속인 것도 아니었을 거다.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운 사랑이었다.. 죽어가는 해진을 버티게 해준 것은 결국 히카루였으니까..
와중에 이윤 너무 좋다! 당당한 천재에다 같은 동류라고 생각되는 (하지만 으뜸은 이윤이고 버금이 해진이다ㅋㅋㅋ) 해진을 너무 아끼는 것도 좋고.. 결국엔 밝혀냈지만 차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도 좋다. 너무 좋다 다음에도 박정표 배우님으로 보고 싶었다. 뮤지컬 회전 너무... 차마 거기까진 발을 들이지 못했지만 회전 돌고 싶다...
섬세한 팬레터에서 히카루의 대사가 좋았다. 히카루의 글이 등단되고, 문인 친구들에게 넘겨서 히카루의 정체가 들통날 뻔 했을 때, 히카루가 보냈던 편지. 왜 우리 사이에 남들이 있어야하냐며 화냈는데.. 다시 찾아봐야겠다.
히카루: 당신에게 실망했습니다. 당신께 준 소설을 모두에게 알리다니 친구에게 편지를 보여주다니. 내가 쓴 말들이 그렇게 당신에게는 가볍기만했는지. 나는 당신만의 것이었는데 당신은 나만의 것 아니었습니까. 우리 사이에 어째서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합니까.
횡설수설했지만, 어쨌든... 너무나 순수하고 이기적이었던 해진을 응원한다.
이윤: 편지란 게 참 신기하지. 단 한 명의 독자만을 위한 글이라서 수신인이 달라지면 모든 가치가 다 사라져버리거든.
해진: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의 한 줄로 내가 나날을 버티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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