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스터 하이든
[미스터 하이든 : 사샤 이랑고 (역자; 김진아) ]
독일 태생의 작가. 인터넷에서 얼핏 책에 관해 읽었다. 저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내연녀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내연녀를 죽이려다 아내를 죽여버린 작가. 작가의 책은 사실 아내의 작품이었다.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요지의 카드 뉴스였다. 언젠간 읽어보고 싶다,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빨리, 책을 도서관에서 만났었다. 우리학교 도서관에는 7일간 빌릴 수 있는 책과 아예 대출이 불가능한 책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아예 대출 불가능한 책이었다. 그렇게 대출에 실패했는데, 얼마뒤에 우연히 다시 만난거다. 이번에는 7일간 대출 가능한 책으로. 이건 운명이다, 싶어서 곧바로 빌렸다.
책이 가볍게 잘 읽혔다. 쉽게 술술 읽히는 책. 빌린 직후 부터, 지하철에서도, 나가서 식당에서 가라아게동을 먹으면서도,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서 잠시 휴대폰을 하다가도 책을 읽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하고 나서부터 책은 같은 책 뿐 아니라 스마트폰의 수많은 컨텐츠와도 경쟁을 해야했다. 영화, 드라마,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각종 커뮤니티의 짧은 재미있는 글들과도 경쟁을 해야했기 때문에 점점 책이 설 자리는 사라져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재미있다. 그 것들과 비교해서도 책에 먼저 손이 간다. 347페이지의 얇지만은 않은 책이지만 그럼에도 독자는 쉬이 책에 손을 뻗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궁금해하게 되는 것이다. 간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책, 그중에서도 내가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문학이 가지는 장점을 다시 느끼게 되서 좋았다. 초등학교때는 스마트폰 같은게 없었으니까 쉽게 책을 읽었다. 재미있었다. 중학교때는 스마트폰도, 웹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었다. 재미있었으니까. 고등학생때는 책을 거의 못읽었다. 국영수 공부에 바빠서. 대학생이 되고 나자, 이제 읽을 책도 시간도 잔뜩 있는데 휴대폰에, 인터넷에 빠져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러다 간만에 이런 순수하게 '재미있는'책을 만나니까 다시 막 신난거다. 휴대폰을 하다가도 다시 덮어두었던 책을 읽을만큼 재미있었으니까.
줄거리는 의외로 별게 없다. 베스트셀러 작가 헨리 하이든. 작품을 정말로 쓰는 그의 아내 마르타. 헨리의 편집자이자 내연녀인 베티. 헨리는 원래 바람을 많이 폈고, 마르타는 그걸 용인했다. 하지만 베티는 임신까지 하고 만다. 늘 만나던 절벽에서 베티와 만나기로 했다.
두 차의 범퍼가 서로 살짝 닿자 가볍게 덜컹거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헨리는 액셀을 살짝 밟았다. 마세리타(헨리의 차)의 힘에 스바루(베티의 차)는 가볍게 밀렸다. 잠시 브레이크 등이 반짝이는 듯싶더니 스바루는 절벽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헨리는 시동을 켜놓은 채 한동안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죽 시트에 머리를 기대어 '에어백이 터지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다. 지금쯤 베티는 필사적으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바다 밑은 춥다. 차가운 바닷물이 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차가 수면에 부딪힌 순간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배 속의 아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테니까. 불쌍한 것.
헨리는 베티가 탔을 터인, 그렇게 믿은 베티의 차를 절벽으로 밀어낸다. 한 사람을, 그것도 사랑을 나눈,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죽이는 데, 이렇게 덤덤한 묘사가 이어지는 것이다. 부담없고 쉬운 서술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하지만 그 차에 타있던 건 베티와 만나 베티의 차를 빌려 탄 자신의 아내 마르타이다. 아내를 죽였다. 헨리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이 아닌 어떻게 넘길 것인가의 문제에 치중한다. 실종신고를 하고, 평소에 수영을 좋아하던 아내가 해변가에서 죽은 것 처럼 굴고, 아직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사람들을 모두 속여넘긴다. 베티에겐 그 차를 실종신고하라고 말하고, 마르타가 베티때문에 자살한 것 처럼 속인다.
그리고 헨리의 친구, 어부이자 물고기를 파는 오브라딘이 대신 베티를 죽여준다. 오브라딘은 종종 금전적으로 헨리의 도움을 받았다. 헨리가 레스토랑에서 베티를 기다리며 전화를 하고 있다는 가장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을 때에.
(207p) 헨리는 '드리나'의 모터를 새로 사람 슬쩍 돈봉투를 찔러주었다. 그리고 그녀(오브라딘의 아내, 헬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은 숫자를 기다려요. 그리고 로또를 사요. 그중 다섯 개만 맞히면 대박인 거예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244p) 헨리는 모자를 벗고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그리고 모자를 손가락에 걸어 빙빙 돌렸다.
"마르타는 해변에서 죽은 게 아냐."
그 말을 들은 오브라딘은 벌떡 일어나 제발 부탁이라는 듯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드리나(오브라딘의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말하지마. 난 알고 싶지 않아.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자네만 알고 있는 걸로 하자고."
따라 일어난 헨리가 오르바딘에게 손을 뻗었다.
"오브라딘, 진정해. 마르타가 사라진 날 밤에 나 해변에 갔었어."
오브라딘은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제발 말하지 마, 부탁이야."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네에게 말하고 떠날 거야. 해변에 가보니 자전거와 옷은 있었는데 마르타는 보이지 않았어."
...
"그 여자 말로는 마르타가 자기 집에 따지러 왔다는 거야. 하지만 마르타 차는 우리 집 차고에 들어 있고 마르타는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어. 내가 안 찾아본 데 없이 다 찾아봤어. 그리고 그날 이후 베티의 차가 없어졌어. 경찰에 도난신고를 했더라고. 그 여자 지금은 내 신용카드까지 쓰고 다니면서 내 아이를 가졌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있어. 법정에서는 내가 그랬다고 하겠지. 그럼 난 살인죄로 감옥살이를 하게 될 거고, 내 재산은 다 그 여자 게 되는 거야. 집이며 소설 판권이며 다."
이윽고 눈을 뜬 오브라딘은 햇살에 눈이 부신 듯 껌벅거렸다.
"보내버리지 그래?"
헨리는 의문이 담긴 눈길로 오브라딘을 쳐다보았다.
"어디로 보내라는 거야?"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그게 어딘데?"
"아주 쉬워. 진짜야."
오브라딘이 속삭이듯 말했다. 헨리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난 그런 일 못해.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많았지만 난 그런 일을 하기에 너무 물러."
"소설 속에선 그렇지 않잖아."
"그건 소설이지. 지어낸 얘기고 상상이잖아. 실제로는 담비 한 마리도 못죽인다고. 오브라딘, 자네는 전쟁을 겪어봤고 딸도 잃어봤잖아. 증오할 줄 안다고. 하지만 난 증오가 뭔지 몰라."
"물고기를 증오해서 죽이나? 아주 쉽다니까 그러네."
헨리는 답답한 듯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사람은 물고기가 아니잖아. 마르타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여자야. 마르타의 빈자리가 너무 커. 집도 휑하게만 느껴지고 글도 쓸 수가 없어. 1,2년 뒤에 엽서를 받거든 내가 보낸 줄 알아. 발신인은 없을 거야. 그럼 그때까지.……."
헨리는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하나 꺼냈다.
"이거 금고 열쇠야. 급히 돈이 필요할 때,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싶을 때 가서 열어봐. 어느 은행인지는 '프랭크 엘리스' 363페이지에 보면 나와 있을 거야. 잘있어, 친구."
-
(311p) "헨리, 우린 이제 끝났어! 줄 거 줬고 받을 거 다 받았어. 난 이제 빚진 것 없어."
그러더니 그는 눈알이 돌아가며 뒤로 쿵 쓰러져버렸다. 머리카락 물속에 잠겼다.
마지막 대사 한번 죽이는군. 헨리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끝났다. 오브라딘이 죽으면 귀찮은 마지막 위험요소도 사라지는 셈이다. 디테일 속에서 범하게 되는 실수, 생각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일들, 보이지 않는 작은 실수들 말이다. 이런 것들이 일을 망친다. 오브라딘은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인간적 요소들과 함께.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베티의 실종과 연관 짓지 못할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배에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까지 운명은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벨트를 풀어 오브라딘의 몸통에 묶고는 배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람이 어쩌다 선해지는 그런 순간이었으리라. 헨리 자신의 생각도 그랬다. 잠시 선해졌을 뿐 그는 여전히 악인이었고 결국 죗값을 치르게 돼 있었다.
베티는 오브라딘에 의해 죽는다. 헨리조차 베티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에 있는 지 모른다. 헨리는 마르타의 환영을 본다.
(292p) "헛간. 헛간에 있는 자기 차 안에 안아 있어. 내 눈에만 보여. 반쪽뿐인 얼굴과 손 없이 손가락들만 있어. 마르타처럼 생기지도 않았어. 하지만 난 마르타라는 걸 알 수 있어. 마르타가 나와 접촉하려고 해."
그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잘 단련된 그녀의 팔뚝근육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일을 겪기엔 너무 어렸다.
"그건 환영이에요, 헨리."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내 눈에 마르타가 보이고 마르타도 날 보고 있어."
이 책에는 주요 인물들 외에도 다른 인물들이 나온다. 그닥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없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억지로 이런 일을 해서 줄거리를 진행시키기 위해 만든 인물들은 아니다. 그 인물들은 그저 묵묵히 자기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할 일을 한다. 그 모든게 줄거리에 영향을 미쳐 주인공이 들킬지말지, 감옥에 가게될지 완전범죄에 성공할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기스베르트 파시이다. 헨리와 같은 고아원에 있었으며, 침대의 2층을 쓰고 싶던 헨리가 갈겨 앞니도 나갔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거절당하고 헨리의 뒷조사를 시작한다. 스토커처럼 헨리에 관한 모든 정보를 모았다. 헨리가 책을 쓴게 아님을 밝혀내기 위해. 헨리의 차를 따라가다 사고가 났고 헨리는 그를 살려주고 입원도 시켜주며 좋은 병실도 준다.
(298p) 헨리는 무게중심을 다른 발에 놓더니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성 레나타. 네가 침대 2층을 썼었지."
호노르 아이젠드라트도 나온다. 베티가 오기 전까지 출판사 사장, 클라우스 모리아니의 총애를 받던 비서다. 사장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결혼하고 유산 전부와 출판사를 물려받아 사장이 되었다. 호노르는 돈 때문에 마르타가 보낸 편지를, 마지막장을, 외침을, 살인사건을 덮었다.
(111p) 마지막 장이 없었다. 대신 마지막 페이지에 '여보......'로 시작하는 편지가 연필로 쓰여 있었다. '여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어떻게 끝날지 알겠어? 키스를 보내며, 마르타.'
(319p) 헨리, 사랑하는 내 남편, 이로써 당신과 당신의 소설을 구합니다. 당신을 빈손으로 돌아서게 하는 일은 예전에도 할 수 없었고 지금도 할 수 없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밝은 빛은 검디검었습니다. 당신이 걱정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헨리가 우느라 아내의 쪽지를 계속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당신을 타락으로 몰아넣든, 당신이 무엇을 사랑하든, 나는 당신의 광기 바깥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보호해주었고 이해해주었고 내가 나 자신으로서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마음속 악령과의 음침한 만남에 서둘러 가느라 이 훌륭한 결말을 내던졌어요. 내가 잘 보관해두었다가 나중에 모리아니 대표님에게 보낼게요. 사랑하는 아내 마르타 드림.
...
분명 착각은 아니었다.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간파하는 호노르가 이 사랑이 듬뿍 담긴 이별 편지와 마르타의 실종사이의 연관성을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마르타는 헨리의 타락과 악령과의 음침한 만남을 언급했다. 그녀의 편지에는 불안한 예감이 담겨 있었다. 만약 호노르가 출판사의 경영인이 아니고 헨리가 그 출판사의 금송아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벌써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현금수표와도 같았기 때문에 모든 도덕적 의구심을 넘어섰다. 그래서 호노르 아이젠드라트, 아니 호노르 모리아니는 경찰 대신 타로카드를 접견하기로 했다. 열한 번째 카드가 나왔다. 정의. 세상에는 저절로 없어지는 의심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카드였다.
헨리는 베티가 아내를 죽인 것 처럼 꾸민다. 베티는 실종 된 것이고.
(335p) "마르타는 베티에게 소설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얘기해주곤 했습니다. 아마 함께 수영을 하면서 말했겠지요. 베티는 상사인 모리아니에게 그대로 보고하면서 그것이 다 자신의 성과인 양 말했습니다. 전 그가실을 알고 무척 화가 났습니다. 분노했습니다! 어떻게 남의 공을 그렇게 가로챌 수가 있단 말입니가? 하지만 아내는 웃으며 그냥 놔두라고 했습니다. 다 자기 방식대로 사는거고 누구나 좋은 면이 있는 거라고요.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사람의 장점만을 보려고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실수였습니다."
...
니들은 베티를 절대 못 찾을걸. 니들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헨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 자신도 오브라딘이 어디에 베티를 빠뜨렸는지 알지 못했다.
헨리는 오브라딘에게 말한 대로 멀리 훌쩍 떠난다. 마지막이다.
(347p) 하이든이 사라지고 1년 뒤 오브라딘 바자리크는 모르는 사람에게서 엽서를 받았다. 거기에는 갈색잉크에 섬세한 필체로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는 것 보다는 항상 혼자인 것이 낫다.'라고 써 있었다.
작품 중간중간 인용되는 마르타의 글은, 그것이 소설 속 작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들게 한다.
(21p) 마르타의 원고는 '침묵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하는 말로 시작되었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헨리는 내내 자신의 죄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간만에 쉽고 재미있고 즐겁게 읽은 외국문학작품이었다. 그래서이다. 다음작품 역시 기대를 하고 외국작품을 골라버리고 만 것은. 그리고 처참히 실패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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